기차시간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울역 광장을 어슬렁거리는데 노숙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얼굴에 핏대를 세우는게 사뭇 흥미로웠다.

 가장목소리 톤이 높게 올라가는 것은 다름아닌 "내가 이래봬도 왕년에는…"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저들도 자기 인생에 태클이 들어오기 전에는 잘나가는 사업가이고 직장상사이고 행복한 집안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왕년에'라도 회상할 수 없다면 지친 영혼에 핏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지만, 왕년은 왕년일 뿐이다. 달라지려거든 그 왕년을 자기 인생에서 놓아버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앞이 보일테니까.

노숙자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의욕을 잃고 과거에 집착하는 부질없음을 탓하는 것이다.

청년실업도 큰 문제이지만, 은퇴자들의 사회적응력을 키워줄 프로그램도 시급하다.

연금, 보험, 저축, 재테크 등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장 필요한 사회안전망은 '일자리'다. 그러나 열정도 기력도 쇠한 은퇴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더구나 왕년의 덫에 갇혀있다면 새로운 일자리를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필자가 아는 A란 분은 정말 왕년에 잘나가던 대기업 임원이었다.

그동안 벌어놓은 것도 많고 인맥도 두터워 사실 일자리가 없어도 아쉬울게 없는 분이었다. 필자도 그리 생각했고 그 분도 그렇게 말하며 낙천적인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그분은 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어서 의아했다.

그 분의 말을 들어보니, 삶의 여유가 있다보니 한동안은 여행도 다니고 낚시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아무런 생각없이 마음껏 쓸수 있는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할 일이 없다는게 너무 고통스럽고 좌절감에 빠져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일자리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아파트 경비 일이었다.

첨엔 가족 등 주변의 만류가 심했지만 일하는 행복이 체면보다 크다는 것을 공감하면서 지금은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것이 가족의 힘이겠지만, 결국은 일이 주는 행복이며 삶을 재충전하는 마력이다.

왕년에 화려했던 사람들이여, 당신도 왕년을 지워보세요. 그래야 남은 생이 진정 화려해질겁니다.

저작권자 © 금융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