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만 먹고 사니?"

 아시는 분은 다 아시고 모르는 놈만 꼭 모르는 거시기한 말이다. 젊은층은 "뭔 말이야?"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중년여성이 되면 저절로 입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자식들 다 자라고, 남편은 제멋대로 인생을 휘어지게 살면서 우울증이 찾아오기 직전에 불거져 나오는 짜증나는 소리다. 나이를 먹었어도 "나도 여자란 말이야. 당신에겐 시들해진 여자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꿈꾸고 있는 청순한 여자란 말이야!!"

산 아래를 힘들게 넘어가는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아직 한밤중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은 충분히 이쁘거든!"

언제부터인지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우리가 쓸데없이 기억하고 챙겨야 하는 무슨무슨 날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남들에게는 간도 빼줄 것처럼 잘해주면서도 오직 나에게만 무심함 사람은 그 잘난 입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날들은 장사꾼들이 돈벌려고 만든 치졸한 상술이다"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밉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기가 불편한 당신을 보면 왠지 서글퍼질지 모른다. 술은 밤새도록 퍼 마시고,담배는 죽어라고 피워대면서 그깟 몇 천원이 아깝다고 상술 핑계를 대는 째째한 사람이라면 더욱 한심스러울 것이다.

실제로 빼빼로 데이에는 편의점의 매상이 껑충 뛴다고 한다. 장사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국적불명의 날인 것 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설날,추석,시부모 생일날···뭐 이런 날만 고귀하게 여겨야 하는 날인가. 그런 날 중년여성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물론 당신들만 모르겠지. 하기야 발렌타인 데이,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 이런 날조차도 아이들의 날이다. 그럼 중년여성들은 왕따인가.

"우리도 끼워줘라, 젊기엔 너무 민망하지만 아직은 늙기에도 서럽다" 그래, 상술이면 어떠랴. 설혹 그럴지라도 이날 하루 만이라도 초콜릿 하나, 사탕 하나, 빼빼로 하나 오직 나만을 생각하며 흐믓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고르는 당신의 손가락이 어여쁜 것을.

김중배의 다이아반지보다도 내 님께서 주신 몇 천원짜리 빼빼로가 내겐 더욱 감동적이고 충만하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나를 잠시라도 바라봐준다면 유치해도 나는 화려할 것이고, 별 것 아닌 과자 하나에도 당신의 온정이 전해진다면 무조건 행복할 것이다.

인생 뭐있나? 서로를 생각해주고 아껴주면 되지. 가난해도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이 그윽하다면 활짝 웃을 수 있고, 나를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기쁨이라면 충분히 넘치고 행복할게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는 말은 이럴 때 온 몸으로 전해지는 전율과도 같은 것이다. 사는게 고달플지라도 하루에 몇분쯤은, 한달에 하루쯤은, 일년에 몇날쯤은 이런 여유라도 만끽하며 살 수 있다면 우을증은 찾아올 틈새가 없어질 것이다.

동양화가 좋은 것은 여백의 미가 맑은 의미를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고 화가가 비워둔 여백에 내가 상상을 펼쳐 그려 넣을 그림이 있어서이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건 그대로 이루어질테니까. 한번쯤은 나에게도 여백을 주시라. 그 여백에 내가 당신을 그려 넣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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