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박찬영 편집국장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혐의로 고발되었을 때 법정 발언을 모아 쓴 책이다. 왜 책 제목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나 주장이 아닌 부정적인 의미의 ‘변명’(apologia)라고 했을까?

변명은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면서 이유를 말하는 경우다. 한마디로 위기를 빠져 나가려는 편법의 말장난이다. 플라톤은 500명의 재판관들에게 무엇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한다. 또한 넓은 안목을 가지고 과연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라고 요구한다.

24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소크라테스의 영감은 이어져있다.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것과 바꾸겠다”는 말을 남겼다. 돈보다 현명하게 사는 지혜가 더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현직 부장판사가 성 매수 현장에서 경찰에 적발됐다. 그렇잖아도 홍만표 변호사와 진경준 검사장 비리 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그로기에 몰린 법조계에 ‘또 다른 한방’이 가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은 전ㆍ현직 지검장의 비리와 달라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2년 전 김수창 당시 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와 비슷한 맥락이다. 결코 성 매수 판사나 음란행위를 한 검사를 옹호할 마음은 없다. 다만 수많은 손가락질 뒤에 감춰진 ‘이면의 진실’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말하고 싶다.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경찰에 따르면 성 매수 부장판사는 밤 11시쯤 고교 동창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 성매매 홍보전단을 보고 따로 연락해 혼자 강남의 한 오피스텔로 갔다고 진술했다. 성관계를 맺은 뒤 20만원 가량을 건네고 나오다가 합동 단속 경찰에 적발 되었다고 한다. 이 판사는 처음에 신분을 감췄지만 경찰의 심문에 들통 나고 만 것 같다.

여기서 단속 경찰의 마음은 어땠을까? “현직 부장판사가 성 매수하다 걸렸다”는 사건이 상부에 보고되었을 것이고 경찰 고위층은 가차없이 입건 조사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왕건이’가 걸린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시작해보자. “법을 위반한 부장판사는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이론의 토를 달기 힘들다. 그러나 법을 위반한 내용보다 법관이 성 매수했다는데 방점이 찍힌 여론이 문제다. “드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법관이…”라는 부분이다. 자연인 김씨가 아니라 법관 김씨의 죄질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 느낌이 든다. 폭력·사기 등과 같이 직접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 아니다. 부장 판사의 성 매수나 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를 ‘질병’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비난의 손가락은 부장 판사 김씨가 아니라 자연인 김씨로 향할지 모른다.

소크라테스 변명의 넓은 안목과 가치로 보자면 비난보다 동정의 안타까움이 먼저 일 수도 있다. 길을 가다 넘어져 상처가 나면 외과 치료를 받듯이 마음의 상처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부장판사 이전에 질병을 가진 사람이다.

해법은 난해하다. 현실적 위법행위와 질병에 걸린 ‘환자’를 바라보는 두 시각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해법 대신 이런 상상을 해봤다. 성 매수를 적발한 경관이 조용히 부장판사를 부른다. “병원 정신과에 같이 갑시다. 치료를 받는 것을 확인 하면 딱 한번만 봐드리겠습니다.”

성 매수 부장판사는 법조인으로 높은 지위까지 성장한 인재다. 우리나라에 소중한 인적 재산이다. 물론 그만한 지위까지 올라가면 그에 걸 맞는 언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 논리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환자’로 바라보는 온정의 시선도 있어야 한다. “왕건이 걸렸다”라고 환호성 지르고 법의 잣대로 엄벌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것은 필자의 상상일 뿐이다. “높은 사람이라고 봐주는 것이냐” “범법자를 감싸고 돈다” “이렇게 봐주면 법치가 흔들린다” ‘현상적 시각’으로만 보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변명일 뿐이다.

그러나 법도 정치ㆍ경제ㆍ사회 등과 마찬가지로 인간 문화의 일부분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해결책보다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환자에 대한 돌팔매가 정의로 포장 되어 있는 자에 대한 ‘분풀이’로 간다면 우리 사회는 더 높은 계단으로 오를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끝내 변명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라면 2400년 전 아테네와 얼마나 다를까?

“지혜는 나이로 먹지 않는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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