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직구 한마디/손규미 기자

 

서커스단의 코끼리들은 어릴 때부터 발목에 밧줄을 매달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아기 코끼리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지만 아기 코끼리들이 풀어내기에는 억센 밧줄이라 풀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와 더불어 아기 코끼리들은 조련사들의 고된 훈련과 매질 등으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공포심이 생겨난다. 그리고 결국에는 밧줄을 풀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얻게 되는 이른바 ‘학습 효과’인 셈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아기 코끼리들은 이후 육중한 몸집을 지닌 성인 코끼리가 되어도 손쉽게 끊을 수 있게 된 밧줄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최근 축소 지급 논란을 낳았던 연금보험금을 전액 지급하겠다고 지급한 생보사들 또한 일종의 ‘학습 효과’인 걸까.

보험사들에게는 서커스단의 코끼리처럼 조련사들이 굳이 매를 들지 않아도 ‘말 한마디’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금융당국’이다. 생보사들은 연금보험금 축소 지급에 대해 당시 규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입장을 표명했지만 금융당국이 잘못을 지적하며 지급을 요구하자 일찌감치 백기를 들고 전액 지급을 결정했다. 자살보험금을 놓고 몇 년 간 첨예한 대립을 지속했던 이전과의 모습은 영 딴판인 상황이다.

연금보험금 전액 지급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금융당국이 주라니까 줘야죠”라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한 홍보팀 직원의 대답에서 업계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을 위해서 전부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금융당국은 정말 잘못을 저지른 보험사를 징벌하는 정의의 사도이기만 한 걸까.

자살보험금 사태는 애초에 잘못된 ‘약관’ 하나에서 출발했다. 당시 동아생명(현 KDB생명)은 2001년 최초로 재해사망시 사망보험금을 더 주는 특약상품을 출시하면서 일본 보험회사의 재해사망보험이 아닌 일반사망보험 약관을 참조했다. 이로 인해 “자살도 재해사망으로 인정돼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는 오역의 소지가 있는 조항이 약관에 포함됐다. 그리고 이 약관을 보험사들이 줄줄이 갖다 쓰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민원이 급증하면서 해당 약관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금감원은 약관에 문제가 있다는 보험사들의 보고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사태를 조기에 진화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해당 상품은 2010년까지 280만건이나 팔려나갔다. 금감원은 2014년, ING생명의 자살보험금 사태가 불거졌을 당시에도 입장을 확실히 정립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골든타임 또한 놓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태는 커졌고, 뒤늦게 금감원은 보험사들에게 전액 지급을 종용했다.

“소멸시효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대법원의 법적 근거를 얻은 생보사들은 지급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금융당국이 영업 정지 및 문책 경고 등의 유례없는 초강력 제재를 내놓자 별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전액 지급을 결정했다.

최근 불거진 연금보험금 축소 지급 논란도 그러했다. 이미 업계에서도 해당 상품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금감원에 알렸지만 그 당시에도 당국에서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언론의 수면 위로 이 문제가 떠오르자 다시 또 보험사들에 전액 지급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전의 ‘자살보험금’ 사태로 호되게 매를 맞은 생보사들의 결정은 빨랐다. ‘학습효과’를 터득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비난의 시선이 보험사들에게 쏠려있는 동안 금융당국은 가만히 발을 빼고 뒷짐을 지고 있다. 금융당국도 문제 있는 상품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데 말이다.

한 술 더 떠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험사들을 ‘힘의 논리’로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보험사 길들이기’, ‘새 정부를 의식한 치적 쌓기’ 등등 업계에 떠다니는 불만들은 금융당국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자신들의 의견만을 강요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금융당국 또한 사태를 크게 번지게 했다는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으름장을 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처벌보다는 앞으로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 감독을 강화하는 것, 이것이 보다 중요한 금융당국의 역할일 것이다.

한 인류학자가 어느 대학교를 방문해 강연을 했을 때 꺼낸 말이 있다. “잘못을, 한 사람의, 혹은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다면 애초에 세상에 ‘공범’이라는 개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다각적으로 행해온 잘못들에 대해서 인지하고 예방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이다.

오늘따라 묘하게도 저 이야기 속에서 ‘금융당국’의 모습이 매치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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