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편집인의 길위에서 만나는 일본문화 이야기
사무라이, 일본 정신의 검날 (하)

일본의 역사적 영웅의 한명인 토쿠카와 이에야스의 초상. 토쿠카와는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도요토미의 아들에게 반란의 누명을 씌워 살해했다. (그림=위키백과)
일본의 역사적 영웅의 한명인 토쿠카와 이에야스의 초상. 토쿠카와는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도요토미의 아들에게 반란의 누명을 씌워 살해했다. (그림=위키백과)

◇배신과 배신이 꿈틀거린 사무라이 역사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에 대한 애칭이 붉은 악마이듯 일본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애칭은 사무라이재팬이다. 야구와 사무라이를 연결시킨 것은 일본에 야구가 전파될 때부터 일본 사회가 무사들이 칼을 들고 겨루는 행위와 야구에서 타자가 투수가 던진 공을 치는 것을 유사한 맥락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야구에는 ‘무사도(武士道)’가 깃들어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었다.

비단 축구뿐만 아니라 일본에 사무라이가 붙은 명칭은 수도 없이 많다.

사무라이 햄버거, 사무라이 숙성회, 사무라이 청바지까지 심지어 일본 채권시장에서 비거주자인 외국 정부나 기업이 발행하는 엔화 표시 채권을 ‘사무라이본드’라고 부른다.

일본인들에게 사무라이는 ‘일본 정신의 본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속에서 수도 없이 사무라이가 나오는 것도 사무라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한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호에도 이야기 했듯이 사무라이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사도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무사도는 ‘평생 한 곳에 목숨 거는 자세’를 뜻하는 ‘잇쇼켄메이(一所懸命)’를 근간으로 한다. 주군을 목숨을 다해 모시고 삿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던 사무라이에게 잇쇼켄메이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도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였다.

일본인들이 역사적 영웅으로 떠받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토쿠가와 이에야스도 배신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수하에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지금의 교토부 교토시 나카교구에 있는 혼노지에서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자신의 주군을 사무라이가 반란을 일으켜 죽게 만든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더 참혹했다. 도요토미가 3세 때 낳은 아들이 죽은 후 오랫동안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할수없이 조카 히데쓰구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했다. 비극은 도요토미가 57세에 아들을 낳으면서 벌어졌다. 친아들이 생기자 도요토미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도요토미는 친아들에게 대를 잇게 하고 싶어 야비한 방법을 쓴다. 조카 히데쓰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트린 후 그를 고야의 절에 유폐시키고 자결하게 했다. 심지어 반란의 불씨를 없애야 한다는 이유로 그 일가도 몰살시켰다.

하지만 배신의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을 앞둔 어느 날 자신의 아들(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됐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다이묘(大名) 4명을 불러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각서를 쓰게 했다. 이른바 후견인이 돼 주길 청한 것이다. 네 명의 다이묘 중 한 명이 이후 전국을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는데 각서를 쓸 무렵에는 누구보다 충직하게 소군주를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일왕(천황)으로부터 쇼군 치호를 받은 후 서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히데요리가 성인이 돼 권력을 이양할 시기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반란을 준비한다’는 누명을 씌웠다.

도요토미가 자신의 조카인 히데쓰구에게 했던 방법을 그대로 재활용한 것이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제거하려 할 때의 수법도 야비하기 그지없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제거하려 오사카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당시 오사카성은 깊은 해자와 돌로 된 견고한 건축물이어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게다가 성안에는 수천명의 사무라이가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여자 사무라이를 히데요리의 어머니인 요도도노에게 보냈다.

“히데요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살려두겠다”고 했다. 아들의 목숨이 우선인 요도도노는 밀약대로 오사카 전투에서 총대장인 히데요리가 전투의 선봉에 서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밀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해자를 메꾼 이에야스는 총공격을 감행했고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결국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1860년경 촬영된 사무라이. 갑옷인 당세구족을 입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1860년경 촬영된 사무라이. 갑옷인 당세구족을 입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만들어진 이미지가 끊임없이 소비

일본인들이 사무라이를 충의와 헌신, 아름다운 절개를 가진 낭만적인 검객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에 쓰여진 전기문학(戰記文學)에서 시작됐다. 이후 세대를 넘어가면서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미화되고 영웅화됐다. 대표적인 작품이 12세기 말 다이라 일족의 흥망성쇠를 그린 <헤이케 모노가타리>, 비극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삶을 그린 <요시쓰네 이야기> 14세기 일본 남북조의 전쟁을 다룬 <태평기>, 18세기 초 무사들의 집단 복수극을 그린 <충신장> 등이다.

사무라이를 영웅화시킨 이 작품들은 이후 노, 가부키 등의 연극으로 재생돼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됐다. 현대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영화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빈민들을 약탈하는 도적 떼에 맞서 비록 용병이지만 7명의 사무라이가 치열한 사투를 벌여 산적들을 전멸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에도시대 사무라이들은 일종의 샐러리맨이었다고 한다. 특별하게 높은 자의식과 도덕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품위를 지키고 살아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사도를 내세우며 살아갈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보통의 무사들이 책이나 영화에서 그려진 무사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실제로 에도시대 연구가인 야마모토 히로후미 교수는 “대하드라마나 역사소설류에 등장하는 무사들은 대부분이 ‘만들어진 이미지’임을 통감한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무사도는 없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에키 신이치 아오야마 대학 일본문학과 교수는 “사무라이가 언제나 정의롭고 공정했으며 약자를 보호했고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정정당당했었다는 이미지는 거짓된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실제 무수한 고사서와 고전문학에 묘사된 무사들은 속임수 공격을 즐겨 사용했으며 여자나 아이 노인 같은 비전투 민간인들을 죽이기도 했다. 왕실(황실)에 소속된 시녀들을 포로로 잡고 자신의 군영으로 끌고가서 겁탈하고 행군하는데 길을 밝히려고 민가들을 불태워 버리거나 항복한 적을 죽이는 만행도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것이다.

2차대전 당시 미국 군함에 카미카제식으로 자살 공격을 가한 일본군의 전투기. (사진=위키백과)
2차대전 당시 미국 군함에 카미카제식으로 자살 공격을 가한 일본군의 전투기. (사진=위키백과)

◇카미카제 특공대 국가폭력의 상징

신이치 교수는 사무라이 정신이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로 발현된 것이 바로 카미카제 특공대라고 말한다. 일본 정부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참여하여 ‘반자이(만세)’를 외치면서 미 함정에 용맹과 기쁨으로 돌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인들의 대표적인 사무라이 정신의 표본이요, 나아가 일본인들의 강인한 정신 야마토 다마시(日本魂)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대중소설 그리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만화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산화한 영웅들로 묘사하고 있다. 한때 일본 여학생들은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사진을 지니고 다니며 애틋한 연민의 정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비롯한 역대 일본 정치가들도 카미카제를 적극 활용했다.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 때문에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출격할 때의 심정을 생각한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용맹무쌍한 카미카제는 없었다. 무사도의 결기로 가득한 일본인도 없었다. 카미카제 당시 생존한 특공대 출신들은 강압적인 명령으로 마지못해 출격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카미카제로 나서라는 명령을 어기면 어차피 자신도 죽고 가족까지 피해를 보게 되니 가족들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카미카제 특공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의 비행에 나섰지만 살아남게 된 것은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편도용 기름만을 실은 비행기를 타고 미 군함을 공격하기 위해 비행하던 중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미 함정에 돌진하기 전에 처참하게 죽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바다에 추락해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살아남은 후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거나 자신이 카미카제였음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것이 뚜렷한데도 바보같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 전쟁을 수행했던 일왕에게 6개월만 일찍 항복을 했었다면 수만명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원망까지 했다고 한다.

남을 해하거나 권력의 심복이 된 이에게서 도를 찾을 수 없다. 무사도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저작권자 © 금융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