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편집인의 인문카페에서 만난 경제학이야기
(1) 여행의 경험으로 탄생한 고전경제학의 걸작 ‘국부론’

인공지능 스테이블 디퓨전이 그려낸 애덤 스미스.
인공지능 스테이블 디퓨전이 그려낸 애덤 스미스.

[금융경제신문=최병일 편집인]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활동에 기초를 둔 사회적 질서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다 보니 경제학의 이면에는 수없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이번호부터 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조금은 가볍게 때로는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인문카페에서 만난 경제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그랜드 투어에서 국부론 구상

1764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한 호텔에서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도버 해협을 거쳐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지 벌써 7개월. 오늘도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은 공부방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의 동행 교사였습니다.

영국의 명문 글래스고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고 있던 애덤 스미스가 왜 교수직까지 내려놓고 그랜드 투어를 떠나게 되었을까요? 그랜드 투어에 걸려있던 조건이 대단히 매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애덤 스미스에게 그랜드 투어를 제안했던 사람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미국 식민지에서 수입되는 유리, 종이, 차에 수입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 법의 주창자인 찰스 타운센드 공작이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우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과 그랜드 투어에 동행하는 조건으로 교수직 연봉 두 배와 평생 연금을 보장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당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당시 영국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인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던 시기였습니다. 영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문화적으로는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랜드 투어는 영국인들의 문화적 열등감을 탈피하기 위한 상류계층들의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란한 그리스 로마 문명을 간직한 이탈리아의 예술과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운 프랑스의 세련된 매너를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 영국의 젊은이들이 도버 해협을 건너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랜드 투어는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동안 이어졌고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요즘 화폐가치로 7억~11억원 정도가 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말이 여행이지 요즘으로 치면 해외 유학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귀족 자제들의 시중을 들어줄 하인은 물론 마차를 몰 마주, 요리사, 여행을 그림으로 기록할 화가와 의사까지 동행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랜드 투어의 본질이 교육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가정교사 격인 동행 교사가 반드시 따라갔습니다. 그러다보니 투어 팀이 수십 명에 달했고 생활에 필요한 옷과 음식, 상비약까지 합치면 대군단이 움직였습니다.

당시 가정교사를 맡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세계역사에 이정표를 그린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었습니다. <리바이어던>을 쓴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를 필두로 계몽철학의 원조인 존 로크, 위대한 수필가 조지프 애디슨,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 그리고 신학과 과학, 라틴어, 수사학, 철학을 공부하고 심지어 천문학 논문까지 쓴 인문주의자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보수가 많다고 하지만 동행 교사의 일상은 애덤 스미스가 토로하듯이 녹녹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그랜드 투어를 떠나 상류층 자제들의 평균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한창 놀기 좋아할 만한 나이에 해외에 나가보니 온통 이들을 자극하는 유흥거리가 천지에 널려 있었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나 파리 등은 유럽 최대의 환락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영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동행 교사라 하더라도 스스로 공부를 청할 리가 없었겠지요. 오죽하면 당시의 동행 교사를 ‘베어 리더’라고 했을까요. 천방지축 날뛰는 곰 같은 학생들을 조련하듯 끌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이랍니다.

애덤 스미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도 공부를 시키려 하면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했겠죠.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니 마음만 고달프고 학문적 업적으로 국왕의 총애까지 받았던 그의 신세가 한탄스럽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고달팠지만 그랜드 투어는 애덤 스미스에게 강렬한 지적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경제학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작품 구상을 하는 시간을 얻었습니다.

그랜드 투어 중에 애덤 스미스는 평생의 친구이자 멘토인 데이비드 흄(1711-1776 영국 철학자, 경제학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글래스고의 삶은 지금 이곳의 삶과 비교해볼 때 참으로 즐겁고 방탕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기 시작했습니다”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때 구상했던 책이 그 유명한 <국부론>입니다.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인데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너무 길기에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그랜드 투어를 끝내고 1766년 영국으로 귀국한 뒤 10년간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콜디에 있는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며 국부론을 완성했습니다.

국부론 원본
국부론 원본

◇자유경쟁시장 통제가 필요 없다

국부론은 흔히들 ‘경제학의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근현대 경제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이루는 시장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라고 설명합니다. 현재까지도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쉽게 설명하라면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정리하면 “자유경쟁 시장은 생산자가 소비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통제와 간섭이 없어도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런 상태에서는 중앙에 앉아 재화를 어느 정도 생산할지를 계획하는 사람도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완벽하게 시장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조절되는 상황에서 과연 국가는 필요한 것일까요? 애덤 스미스는 국방과 법 집행 이외에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가격통제와 진입장벽과 같은 경쟁적 시장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하는데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자유경쟁을 방해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시장에 대한 믿음은 이후 고전경제학을 거쳐 경제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현재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거두이자 시카고학파의 밀튼 프리드먼 같은 이는 애덤 스미스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주장을 펼쳐 놓습니다. 프리드먼은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정부가 개입하면 할수록 이상해질 따름이고, 개인들의 자유로운 판단이 모인 시장에 맡기는 게 제일 낫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밀튼 프리드먼 같은 극단적 시장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두고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시장만능주의로 오해받을 만한 내용을 남긴 것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썼던 당시 영국의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를 급속히 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식민지경영을 하면서 국가의 부가 최정점에 올라섰습니다. 전세계 곳곳에 식민지가 있어서 대영제국은 그야말로 태양이 꺼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영국의 자본을 점유한 이들은 극소수의 독점자본가들이었고 이들은 정부에 돈을 대면서 정부가 중상주의를 표방하도록 종용했습니다. 말이 중상주의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자본주의 초기이다 보니 자본주의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영국 정부는 독점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이전 왕정시대처럼 아무런 기준 없이 민간의 경제활동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있었고, 이를 경제주체 모두가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에든버러의 애덤 스미스 동상. (사진=픽사베이)
에든버러의 애덤 스미스 동상. (사진=픽사베이)

◇국부론 오역하는 일 부지기수

사실 국부론에서 주장했던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과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은 상당 부분 오해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는 독점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독점은 수입의 모든 원천, 즉 노동임금과 토지지대 그리고 자산에 의한 이윤을 그것이 없는 경우보다 훨씬 감소시킨다.”고 말하며 독점을 막는 제대로 된 정부의 정책이 필요함을 설파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18세기 인물임에도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유용한 담론을 제공합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지도 않았던 시기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주었던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였습니다.

국부론에는 오늘날 모든 산업공정에 필수화된 분업과 화폐의 역할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Self-Interest)이 경제 행위의 주요한 동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단 인간의 이기심은 사회 도덕적 한계 내에서 발휘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맹목적인 이기심’ 혹은 ‘물질적 이기심’으로 오역되면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애덤 스미스가 죽기 전 묘비명에 자신을 <국부론>의 저자가 아니라 또 다른 걸작인 <도덕감정론>의 저자로 적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습니다.

국부론은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삶도 어쩌면 자본주의적인지도 모릅니다. 막대한 강사비용 때문에 그랜드 투어에 합류했고, 샐러리맨의 고단한 삶 속에서 걸작을 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애덤 스미스에게 창조의 원천은 무료함이었을까요? 아니면 호기심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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