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편집인의 길위에서 만나는 일본문화 이야기
일본경제의 그림자 ‘잃어버린 30년’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체결된 ‘플라자 합의’는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일본경제가 30년간의 장기불황을 겪게되는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의 원인을 제공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픽사베이)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체결된 ‘플라자 합의’는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일본경제가 30년간의 장기불황을 겪게되는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의 원인을 제공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픽사베이)

◇미, 무역수지 적자 막고자 플라자협정 체결 
미드타운 5번가에 있는 유서 깊은 호텔 뉴욕플라자는 객실 230개를 갖춘 뉴욕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나홀로 집에2’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고 비틀스와 마크 트웨인 등 유명 인사들이 애용했던 호텔이기도 하다. 

뉴욕플라자는 한편으로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협정이 이뤄진 장소이기도 하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 고급 의전용 리무진 차량이 줄지어 도열했다.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등 G5국가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의 주재로 진행된 협상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싸늘했다. 말이 협상이지 미국의 압박은 우격다짐과 협박의 중간쯤 되는 수준이었다. 

미국 측은 일본 통화가치의 절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미국이 일본 물건을 계속 사주는데 일본은 미국 물건도 안 사주고 수출만해서 경상수지 악화가 심각하다는 것이 회담의 요지였다. 일본 측 재무대신과 일본은행 총재는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협상당시 미국경제는 재정적자에 무역적자가 더해진 이른바 ‘쌍둥이 적자’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본의 GNP(1인당 국민소득)는 이미 미국을 추월한 지 오래였다. 

미국 경제의 그늘이 짙어진 시작점은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10월 1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 대비 5%씩 감소하겠다고 발표한다. 1차 석유파동의 시작이었다. 이어 1978년엔 이란 내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OPEC이 다시 유가를 올리면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3년 석유 파동 전 배럴당 3달러2센트였던 유가는 1978년 이란이 석유생산을 감축하고, 사우디아라비아마저 감축에 들어가자 배럴당 40달러까지 뛰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는 전세계적인 경제불황을 불러왔다. 원유값 상승으로 대부분의 물가가 오르는데 실업마저 덩달아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등장한 것이다. 이 파고를 최강대국인 미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70년부터 1981년 사이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한해 15%까지 뛰고 실업률이 9%에 달하기도 했다.

해결책을 고민하던 미국은 경상수지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다소 강압적인 선택을 했다. 일본과 서독을 표적삼아 통화가치를 절상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자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미국의 노림수는 엔화와 마르크화의 절상, 즉 달러 절하를 통해서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일본은 버티지 못했고, 미국 재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성공적인 회담이었다고 자평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다. 

독일 마르크화는 1주 만에 달러화에 대해 약 7% 엔화는 8.3% 각각 오르는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이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는 30% 이상 급락했다. 덕분에 미국제조업체들은 달러 약세로 높아진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서 승승장구 했으며 미국경제는 회복세로 들어섰다. 

◇한국전쟁 기회삼아 폭발적 성장 
일본의 장기 불황이 플라자 합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사실 일본경제의 몰락은 거품경제 시절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무조건 항복을 할때만 해도 일본 경제의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쿄는 무수한 공습으로 ‘석기시대’로 돌아간 상태였고,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100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돌고 있었다. 

암울했던 일본을 건져준 것은 패망 이전까지 일본의 식민지국가였던 한국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공산주의의 남하를 극도로 경계했던 미국은 일본에 병참기지를 건설했다. 수많은 전쟁물자가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던 일본에 단비와도 같은 축복이 쏟아진 것이다.

한국전쟁 특수와 관이 주도하는 효율적인 경제 전략이 맞아떨어지며 일본은 1950년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일본인의 근면성, 높은 저축률도 급격한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1966년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돼 일본은 국제수지의 제약에서 해방됐다. 1968년에는 독일을 앞질러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몸살을 앓았던 1970년대 오일 쇼크가 가장 큰 위기였다. 당시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원유 수출가격을 70% 인상하고 공급도 줄여 원유가격은 석달 새 4배나 급증했다. 

1차 오일쇼크 당시 중동지역에 대한 일본의 원유 의존율은 77.5%에 달했다. 유가 급등에 공급부족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중에서는 불안감이 커졌다.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이 사재기였다. 슈퍼에서 화장지나 세제 등이 자취를 감췄고 이는 가격 인상으로 이어졌다. 1974년 소비자 물가는 무려 20% 넘게 급등했다. 어찌나 물가가 올랐는지 언론에서는 ‘광란의 물가’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가의 영향으로 최소 3% 이상을 기록했던 성장률이 1.2%를 기록하며 고도성장기를 마무리했다. 

유가관리와 석유 비축의 중요성을 느낀 일본 정부는 민간의 석유비축을 의무화하고 민간의 석유사용량을 제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했다.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의 불황동안 일본도 급격한 후퇴를 하기는 했지만 어떤 선진국보다 빨리 회복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일본 경제가 석유 파동의 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다른 선진국들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위치까지 올라섰다. 당시 일본이 해외 수입에 의존했던 것은 생필품과 일본이 정치적인 이유로 만들지 않았던 민간 항공기와 같은 몇몇 완제품뿐이었다. 

경제가 안정되고 돈이 쌓이자 부동산과 주식투기 열풍이 불었다. 주식 가격이 미칠 듯이 폭등해 거품이 엄청난 수준까지 다다랐고 자산 시장 거품으로 돈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다 보니 일반 직장인들도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길 정도가 됐다. 

‘일본을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나오고 한 술 더 떠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도 나왔다. 도쿄 긴자에서 제일 비싼 땅 값이 평방미터 당 10억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 일어난 일들은 하나같이 비상식적이었다. 

채용 면접 때 기업에서 교통비조로 일종의 면접비를 주었다. 통상 1인당 2만~3만엔씩 쥐어 주었는데 당시 한국의 평균 대졸 초봉이 50만원대 초반이었고 당시 도입된 최저임금이 20만원대 수준이었다. 

◇바젤합의로 거품 붕괴 시작, 기나긴 불황
당시 환율에 맞춰 계산한다면 차비 1~2번 받으면 한국에서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와 비슷한 돈을 받는 거고 4~5번 받으면 한국 대졸 초봉과 비슷한 금액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면접비가 워낙 많다 보니 취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면접만 보러 다니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면접비를 후하게 주었던 이유는 기업들이 흑자가 나는데도 일할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D 직종이라서가 아니라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어서 굳이 취직을 하려 들지 않았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집에 돈이 넘쳐나서 취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기업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중소기업들은 생산직 사원을 구하지 못해서 버블 시대가 지옥 같았다고 한다. 

버블 경기가 절정에 이르던 1989년부터 1991년도까지 유효 구인 배율이 1.4 정도를 기록했는데 구직자 1명당 일자리가 1.4개에 달했다는 뜻이다. 당시 20대 연봉이 무려 1000만엔에 달했다. 물론 이 정도 급여는 당시에도 잘나가는 직장인만 받을 수 있었지만 중소 기업에서도 월급 펑펑 올려주었다.

당시 도쿄 길거리엔 벤츠 190E, BMW E30 3시리즈 등 고급 외제차가 돌아다녔고 페라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국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방에서도 건설 붐이 일어 보여주기식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00여명이 사는 섬마을에 다리를 2~3개씩 놓았으며 주민 60명이 사는 마을 앞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버렸다.

당시 자민당과 건설업체, 그리고 지역유지들의 정경유착에 따른 전시성 공사들이었는데 거품이 꺼지고 나서는 유지비가 부담돼 철거되거나 건설사들이 파산하는 곳이 많았고,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인 지자체들이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긴자의 호스티스 중에서는 하루 접대를 해주고 1억엔의 용돈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미국의 자산들이 하나둘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소니는 할리우드 영화사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했고 라이벌인 파나소닉은 유니버설 픽처스를 인수했다. 일본의 부동산 재벌 요코이 히데키가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인수했다. 

전세계 억만장자 중 70%가 일본인이었으며 세계 1등 갑부가 세이부 창업자 츠츠미 야스지로였다.

하지만 거품경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부동산 대출을 자제하도록 금융 기관에 통지했고, 감시 구역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규제를 실시했지만 이런 규제로는 미쳐버린 부동산 시장을 잡을 수 없었다.

이 때, 일본 부동산 거품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요인이 외부에서 발생한다. 

국제결제은행은 1988년 ‘바젤합의’를 통해 전세계 은행들이 1992년까지  총 위험자산 대비 최소 8%를 자본금으로 늘려 유지해야 한다는 권고 규칙을 만들게 된다. 일명 BIS 자기자본 비율이었다. 이를 통해 1992년까지 전 세계 은행들은 무조건 BIS 자기자본비율을 무조건 8%까지 맞춰야만 했다. 

일본 정부는 1989년 3%의 소비세를 신설하면서 동시에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까지 올렸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신규 대출 금지), 기존 대출도 LTV(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을 200%에서 70%로 제한했다. 급격한 금리인상에 돈을 갚을 능력이 안되는 사람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내놓으며 주식과 부동산 자산 가치 하락이 잇달아 발생했다. 

은행이 돈을 회수하고, 사람들이 개인 채무를 갚느라 소비가 위축되니 일본은 길고 긴 불황의 터널에 진입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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