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편집인의 길위에서 만나는 일본문화 이야기
일본회의, 일본을 움직이는 비밀정부

故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가 과거 총리 퇴임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사실을 트위터(현 X)에 올린 모습. 아베 총리는 일본회의라는 극우주의 단체를 지지하고 내각 구성원 상당수를 일본회의 멤버로 구성해 주변국으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은 바 있다. (사진=뉴시스·아베신조 트위터 캡처) 
故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가 과거 총리 퇴임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사실을 트위터(현 X)에 올린 모습. 아베 총리는 일본회의라는 극우주의 단체를 지지하고 내각 구성원 상당수를 일본회의 멤버로 구성해 주변국으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은 바 있다. (사진=뉴시스·아베신조 트위터 캡처) 

◇아베 이어 기시다 내각의 3분2가 일본회의 
지난해 7월 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수상이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통상선거를 앞두고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도중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암살범 야마가미 데쓰야는 어머니가 통일교 신자인데 많은 액수를 기부해 파산했다며 통일교와 관련이 있는 아베 신조에 대해 깊은 원한이 생겼다고 했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통일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였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키가 국제승공연합 설립에 관여했고 아베 총리도 관방장관 시절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아베가 통일교와 밀착한 이유는 단지 이뿐만이 아니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와 극우적 이념가치가 아베의 사고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베가 전폭적 지지를 보낸 곳은 일본회의라는 극우주의 이념단체다. 아베 정권은 ‘일본회의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2015년 10월에 발족한 제3차 아베 개조 내각의 각료 20명 중 적어도 12명이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의 멤버였으며, ‘신도 정치 연맹 국회의원 간담회’의 참가자 17명과 합치면, 정권의 9할(20명 중 18명)을 우익 개헌 세력이 차지했을 정도다.

아베 정권이 국민 여론이나 국내외의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강권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이 특이한 세력의 인사만으로 내각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일본회의의 영향력은 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정권까지 이어진다. 기시다 내각 구성원 중 극우단체에 이름을 올린 각료가 3분의 2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극우단체인 ‘일본회의’에 관한 분석서인 ‘일본회의의 연구’의 저자인 스가노 다모쓰(菅野完) 씨는 기시다 총리를 포함해 내각 구성원 21명 가운데 14명이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모임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몸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기시다 총리 이외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장관,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경제산업상 등이 일본회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회의는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인 태평양 전쟁에 관해 “대동아전쟁은 자위(自衛) 전쟁”이라고 주장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대한 비판을 두고 “사실관계를 무시한 근거 없는 비난이 일본 정부와 일본군을 향하는 풍조”라고 주장한 극우단체다.

일본회의 홈페이지에는 전신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돼 2009년 5월 30일에 설립된 전국에 풀뿌리 네트워크를 가진 국민운동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회의의 전신중 하나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1974년 4월 결성)은 생장의 집의 창시자인 다니구치 마사하루 등 신종교·신도계의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돼, 1975년에 ‘쇼와 50년을 축하하는 국민의 모임’을 개최해 우익적 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1981년 결성)는 1978년 이시다 카즈카와 전 대법원장의 호소로 발족한 ‘원호법제화 실현 국민회의’의 연장선상에 우익적인 학자문화 사람이나 경영자를 중심으로 재출발했다.

일본희의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극우 이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천황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메이지·다이쇼·쇼와의 원호법제화의 실현, 왕실의 경사를 축하하는 봉축운동 등을 전면화 하는 것도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 움직임을 경계하는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교육의 정상화나 역사 교과서의 편찬 사업 등을 통해 제국주의 역사관을 확산시키는 한편 종전 50년 전몰자 추도 행사나 아시아 공생 제전 개최, 자위대 PKO 활동에의 지원, 전통에 근거하는 국가 이념을 제창한 신헌법의 제창 등을 통해 평화헌법으로 대표되는 현행 전후체제를 부정하고, 전쟁 전 및 전시의 일본 체제와 사상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도 극우단체인 일본회의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기시다 총리. (사진=뉴시스 제공)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도 극우단체인 일본회의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기시다 총리. (사진=뉴시스 제공)

◇신흥종교 생장의 집 출신 활동가가 일본회의 주축
일본회의는 2016년 기준으로 약 3만8000명의 회원과 243개 지부, 약 1700명의 지방의회 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회의의 초대 회장은 와코르 회장이었던 츠카모토 코이치였고 2대 회장은 이시카와지마 하리마 중공업 회장이었던 이나바 코사쿠 3대 회장은 전 대법원장이었던 미요시였다. 2015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교린대학 명예 교수인 타쿠보 타다에다. 
조직 운영의 중추를 담당하는 집단은 신흥 종교 단체인 생장의 집 출신 활동가들이다. 

생장의 집은 1930년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설립한 일본의 신홍종교단체다. 일본 신도에 기반을 두되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종교적 교리와 심리학 현대 철학 등의 융합을 시도한다. 

생장의 집은 일본 신도계의 신흥종교였던 오모토의 방향에 불만을 품고 독립해서 설립했다. ‘생장의 집’이라는 교명은 정식 종교단체가 되기 전부터 발행하던 포교용 잡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생장의 집이 일본회의와 깊은 연관을 갖게 된 것은 다분히 설립자인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쓴 책을 열심히 읽으면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 종교가의 면모를 보였다. 

다만 다른 사이비 종교가들이 정치적인 면에 대해서는 선을 긋거나 무관심한 반면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대단히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며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등 극우적 이념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예수그리스도도 일왕에게서 비롯됐다는 황당한 교리를 설파하기도 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인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결성했으며, 당시 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했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일왕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했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명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 의원이며 노동성 대신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正邦)이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 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를 결성했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을 일소한다는 큰 성과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했다.

일본회의는 제국주의 일본으로의 회귀작업을 치밀하게 진행해왔다. 문제는 일본회의의 배타적 주의·주장, 불관용이 일본 국민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회의의 정체’를 쓴 아오키 오사무는 “일본사회 전체가 병에 걸렸다”고 단언했다. 도쿄대 명예교수 시마조노 스스무는 “매우 위험하다. (일본회의가) 정교 분리를 짓밟고 있어서 이는 전쟁 전으로의 회귀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회의의 최종 목적은 ‘전쟁을 포기하고, 이를 위한 군대는 보유할 수 없으며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헌법 9조의 삭제다.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만들어 제국주의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일본회의를 주시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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