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편집인의 길위에서 만나는 일본문화 이야기
사무라이, 일본 정신의 검날 (상)

1970년 11월 25일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일본 육상자위대 영내에 잠입한 미시마 유키오가 발코니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크리에이티브 커먼스)
1970년 11월 25일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일본 육상자위대 영내에 잠입한 미시마 유키오가 발코니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크리에이티브 커먼스)

◇미시마 사건계기로 사무라이 재부각

197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20분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일본 육상자위대 영내에 5명의 사람들이 난입했다. 카키색 군복에 일장기 모양이 그려진 흰 머리띠를 동여매고 일본도를 손에 쥔 일당들은 마스다 가네도시 총감의 면회를 요청하며 총감실에 들이닥쳤다.

침입자 중 주동자격인 사람은 놀랍게도 당시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1925~1970년)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평을 받으며 등단했다.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데뷔한 이래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명망이 높은 작가였다. 극우적인 성향으로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했던 작가이기는 했지만 자위대 난입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중앙일보 1970년 11월 25일자 기사를 살펴보자.

“미시마는 ‘쿠데타’에 관한 조건을 총감에 제시했으나 거부되자 돌연 총감 옆에 붙어있던 야마사끼(53·행정부장), 다까하시(44·총무반장), 나까무라(45) 등 3명을 일본도로 냅다 찌르고 총감은 인질로 붙들어 총감실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버티었다. 정오 조금 전 미시마는 총감에게 연병장에 자위대원 2000여명을 모이게 강요한 뒤 이찌가야 영내의 발코니에 모습을 나타내고 ‘일본의 헌법은 자위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런 헌법을 왜 지키려하는가?’고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미시마의 연설 요지는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일왕(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와 문화전통을 지키는 것이고, 자위대는 사무라이(무사)인만큼 헌법개정을 통해 일왕(천황)을 보위하는 사무라이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원래 30분 정도로 예정되었던 연설은 8분 만에 끝이 났다. 미시마는 연설을 마친 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행과 함께 “천황폐하 만세”를 3회 외치고 발코니에서 자취를 감췄다.

낮 12시 10분쯤 총감실로 돌아와 부하들에게 총감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 마루에 꿇어 앉아 일본도로 배를 찔렀다. 소위 말하는 할복을 시도한 것이다. 이때 그와 동행한 모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미시마의 목덜미를 칼로 내리쳤다. 모리다도 곧 뒤따라 배를 찔러 자결했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도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미시마 사건’이다.

미시마 사건은 이후 극우 정치인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됐다.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집념이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마치 자신이 사무라이의 현신인 것처럼 행동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사무라이 정신은 결국 허울뿐이며 패전의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았고 일왕(천황)을 위해서 자결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미시마 유키오는 일왕과 국가를 위해 사무라이처럼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사라진다)를 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시마 유키오가 죽음을 선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무라이 정신은 무엇일까?

일본의 정신으로 칭송받는 사무라이 정신은 실체가 없는 허황된 이야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픽사베이)
일본의 정신으로 칭송받는 사무라이 정신은 실체가 없는 허황된 이야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픽사베이)

◇무사도 실체없는 허황된 이야기라는 지적

무사도는 구체적으로는 일본내에서 무사 계급의 윤리 도덕 규범이나 가치 기준 등을 이루는 사상을 말한다. 메이지 시대의 학자였던 니토베 이나조(1862~1933)는 자신의 저서 <무사도>에서 사무라이 정신을 심오하고 도덕적이며 고귀한 것이라고 예찬하고 있다.

“무사도는 일본의 상징인 벚꽃과 함께 같은 일본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 꽃피운 고유한 꽃이다. 무사도는 아직도 우리들 사이에서 힘이 되고 또 미적인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종교에 광신적인 사람의 경우에도 주정뱅이 광태에서는 볼 수 없는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고귀함이 있는 것처럼 명예에 관한 무사의 극단적인 민감함 속에서 순수한 덕의 바탕이라고도 할수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무사도는 부권정치(父權政治)를 받아들인다. ‘자긍심이 높은 복종’, ‘기품이 있는 순종’ ‘예속임에는 틀림없으나 기품있는 자유로운 정신의 고양이 지속되는 복종’”이라고 말한다.

니토베는 무사도가 마치 일본 정신의 최고봉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 그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상인지는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국화와 칼>이라는 저서로 일본을 서양에 알린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결점과 약점에 대해서도 무사도는 커다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다. 일본인이 느끼기 쉽고 격하기 쉬운 것은 명예욕 탓이다”고 무사도를 폄하한다.

일본 무사 연구의 대가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고베대학 명예교수는 <사무라이의 역사(원제 武士の日本史)>에서 일본이 무사의 나라라고 할 수 있었던 시기는 길지 않았고 역사에 등장하는 무사나 무사도에 관한 묘사에는 과장, 왜곡이 많다고 지적한다. 무사가 등장해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고 무신 정권인 막부의 주역으로 등장하기까지의 역사와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 그들이 참가했던 전투의 양상을 꼼꼼히 살피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저자는 무사도가 국민도덕이나 일본인의 정신적인 배경인 것처럼 말하는 목소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은 조선 침략전쟁이 끝나고 성립된 에도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무국(武國)으로서의 자화상을 확립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때부터 일본은 전쟁이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무국이란 말뿐이라는 것이다. 당대와 후대에 널리 전승된 무사에 대한 기술에도 오류가 많다.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기마무사 집단이 용맹하게 질주하는 모습이 곧잘 나오지만, 조랑말 크기에 불과했던 당시 전마(戰馬)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무사가 마상에서 칼을 휘두르는 장면도 허구에 불과하며 기마병의 주력 병기는 활과 화살이었고 기록상 사상의 원인도 화살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저자는 무사도를 쓴 니토베 이나조가 “일본의 역사나 문화를 잘 알지 못했고 그가 주장하는 무사도는 부분적인 사실이나 습관, 논리·도덕의 단편을 쓸어 모아 머릿속에 있는 ‘무사’ 상을 부풀려 만들어낸 일종의 창작”이라고 일축한다.

일본 사무라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구노스키 마사시게의 동상. 구노스키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충신으로 유명하다. (사진=픽사베이)
일본 사무라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구노스키 마사시게의 동상. 구노스키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충신으로 유명하다. (사진=픽사베이)

◇귀족경호하던 세력 무신정권 한축으로

사전적인 의미로 사무라이(さむらい)는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武士)를 뜻한다. 본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족이나 다이후를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요즘 말로 경호업체의 경호원이었다는 것이다.

경호원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무라이가 처음부터 무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품계상으로도 사무라이는 그렇게 높은 직위는 아니었다. 일본의 위계 6위 정도의 하급기능직 관인층이니 요즘 기준으로 9급 공무원 정도였을 것이다. 사무라이는 출세를 한다 해도 귀족의 말석인 5위 정도까지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학자 중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가 삼한과 삼국시대에 걸쳐 성장했던 지배계급 무인들인 ‘싸울아비(싸우는 아비)’가 일본에 건너가 한국말을 그대로 쓰면서 사무라이로 변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싸울아비가 사무라이라는 근거에 대해 두 집단이 자부심이 강하고 엄한 자기규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귀한 생명도 조직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바치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는 점이 닮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객관적인 근거나 역사적 사료가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지만 1970년대 초까지 이 학설이 통용되기도 했다.

사무라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였다. 당시 귀족과 승려 계급이 성장하면서 일왕(천황)과 팽팽하게 맞섰다. 일왕은 귀족과 승려 계급을 견제하기 위해 아스카, 나라, 헤이안 등으로 수도를 옮겨 다녔다. 막강한 힘을 지닌 귀족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귀족 계급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신들의 세상이 오자 재산을 지키고 보안을 강화할 목적으로 경호집단을 고용했고 이것이 사무라이의 시초라는 것이다.

사무라이가 일본에서 주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가마쿠라 시대(1180~1333년)다. 당시 미나모토 요리토모라는 인물이 실권을 장악하고 도쿄 서남부에 있는 가마쿠라에 쇼군(將軍 장군)의 정부인 바쿠후(幕府 막부)를 세웠다. 사무라이는 이때부터 막부를 떠받드는 세력으로 지분을 갖추게 됐다.

사무라이는 가마쿠라 막부시대 쳐들어온 몽골군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군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무라이 문화가 형성된 시기는 흔히 말하는 센코쿠 시대(戰國時代 전국시대·1467~1573년)였다. 이 시기에는 그나마 중앙의 질서를 유지하던 무로마치 막부의 힘마저 유명무실해져서 일본 각지의 다이묘(大名 영주)들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들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로부터 보호받고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에 다이묘들을 주군으로 섬기며 그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병력을 고용해서 전쟁에 나가 싸웠다.

바로 이 시기에 일명 ‘무사도’가 생겨났으며, 사무라이들 역시 단순한 무사에서 영지를 받고 싸우는 준귀족 계층으로 신분이 상승함에 따라 사무라이 특유의 문화도 더욱 발달하였다.

사무라이들은 영주가 살고 있는 성 아래 마을(城下町 조카마치 じょうかまち)에 거주했다. 사무라이 안에도 급이 있어 상급 사무라이, 중급 사무라이, 하급 사무라이가 있었으며 거주하는 장소도 각자 달랐다.

이 시기 사무라이들은 아래 신분의 사람들을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아무래도 수시로 전쟁이 일어났던 전국시대 분위기가 한몫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사무라이들의 위세는 최절정에 달해 있었다. 완성된 칼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밤에 지나가는 행인을 베던 츠지기리(辻り(つじぎり))로 인해서 치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츠지기리는 토오리마(通り魔) 즉 ‘통행로의 악마’(묻지마 살인)라고 불렸을 정도니 민간인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갈 정도다. 센코쿠 시대를 지나 에도 막부 초기까지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기자 결국 사무라이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무사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규범이나 사상은 존재했지만, 이때부터 무사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무사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학설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금융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