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편집인의 길위에서 만나는 일본문화 이야기
신사, 일본인을 담은 블랙박스 (하)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 불리는 아마테라스 여신을 그린 그림.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 불리는 아마테라스 여신을 그린 그림.

◇고사기 속 창세신화 신토의 토대

일본의 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왕실(황실)과 일본창세신화를 알아야 한다. 특히 일본 왕실은 신사와 한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밀착돼 있다. 실제로 일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신사를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토의 신앙에 근거한 제사 시설로 황실이나 씨족의 조상신, 위인이나 의사들의 영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규정한다.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에 따르면 일본이라는 섬나라를 만든 신은 일본 왕실(천황가)의 황조신으로 불리는 이자나기다. 이자나기는 지금의 효고현 자리에 아와지 섬을 만들고 이후 혼슈, 시코쿠, 규슈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자나기의 누이이자 부인인 이자나미는 창조와 죽음을 담당하는 신이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에 얽힌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박진감이 넘친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결혼해 낳은 아이가 불의 신 가쿠즈치였다. 가쿠즈치를 낳는 도중 이자나미는 음부가 불에 데어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이 아이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며 아들인 가쿠즈치를 칼로 무참하게 베어버렸다. 가쿠즈치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갈라진 몸 사이에서 8개의 화산의 신이 태어났다.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화산 활동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를 대단히 사랑했던 이자나기는 지하세계(저승)까지 내려가서 이자나미를 구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자나기가 지하세계에 도착했을 때는 이자나미가 이미 저승의 음식에 입을 대고 말았기 때문에 그녀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저승의 음식을 먹는 순간 저승에 속박된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여기서 물러날 이자나기가 아니었다. 끈질기게 이자나미에게 지상으로 가자고 하자 이자나미는 저승의 신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단 일곱 밤과 일곱 낮 동안 자신의 모습을 보면 안된다고 당부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나 신이나 마찬가지의 속성인가 보다. 이자나기도 호기심을 못 견디고 아내의 몸을 보았다. 그 순간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내의 몸이 부패해서 진물이 뚝뚝 떨어지고 그 사이로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이자나기는 경악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자나미를 구출해 오겠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는 이자나기를 본 이자나미는 저승의 귀신을 데리고 이자나기를 쫓았지만 그를 붙잡지 못했다. 이자나미가 기를 쓰고 쫓아오는 것을 본 이자나기는 두려움을 느끼고 저승세계와 이 세상의 경계에 커다란 바위를 놓아 서로 왕래할 수 없도록 했다. 분노한 이자나미는 하루에 1000명씩 이자나기의 백성들을 죽였다. 그러자 이자나기도 하루에 1500개의 산실(아이가 태어나도록 했다는 뜻)을 두었다.

이런 연유로 이자나미를 창조와 죽음을 담당하는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자나기는 저승에서 본 부정한 것을 털어내려고 물로 몸을 씻자 왼쪽 눈에서 아마테라스, 오른쪽 눈에서 츠쿠요미, 코에서 스사노오가 탄생했다. 이 세 명을 삼귀자라고 하는데 일본 신화는 물론 신토에서 중요하게 받드는 신들이다. 특히 천조신으로 불리는 아마테라스는 태양의 신이자 황실의 조상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줄지어 선 1000개의 도리이로 유명한 일본 교토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센본도리이. (사진=픽사베이)
줄지어 선 1000개의 도리이로 유명한 일본 교토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센본도리이. (사진=픽사베이)

◇아마테라스, 신토의 주신 일왕실 수호자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인 이세신궁의 주제신이 바로 아마테라스 여신이다. 츠쿠요미는 밤과 달의 신이다. 아마테라스는 츠쿠요미에게 오곡을 관장하는 신인 우케모치를 만나라는 명을 내렸다. 우케모치는 나름 지상으로 내려온 츠쿠요미를 환영하고자 여러 음식을 내놓았는데 하필이면 음식을 만드는 곳이 우케모치의 입이었다. 이를 본 츠쿠요미는 입으로 먹을 음식을 입에서 쏟아내냐고 화를 내며 우케모치를 죽여버렸다. 기괴하게도 우케모치의 시신에서 다양한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이마에서는 소와 말이 기어 나왔고, 머리에서는 조가 눈썹에서는 누에가 나왔다. 눈에서는 벼 알갱이가 배에서는 벼가 나왔고 음부에서는 보리와 콩, 팥 등의 주요 곡물이 나왔다.

이창재 프로이드 정신분석 연구소 소장은 일본의 창조설화에 대해 하늘(이자나기)과 태양(아마테라스)과 천황(중보자)이 존재하는 한 일본과 일본민족은 신화적 사고 속에서 신성한 임과 동일시돼 현세의 모든 불안과 고통을 이겨내며 영원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 소장은 “일본신화는 다수의 민속의례와 전통종교(신토)와 연관해 일본인의 정신에 내재돼 계속 유지된다”며 “일본의 신사가 ‘일본 정신의 총합’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신사는 일본인들의 정신적 DNA 깊숙한 곳에 감춰진 블랙박스인 셈이다.

신사에 가면 동물 모양의 조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 신사에서 동물의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신의 사자를 의미한다. 이나리 신은 여우를 신의 사자로 여기고 있으며 아마테라스는 닭, 스미요시대명신은 토끼, 마쓰오대명신은 거북이를 신의 사자로 두고 있다.

도리이(鳥居)는 신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문이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도리이는 일종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신의 구역과 인간의 구역을 나누는 역할과 동시에 신성한 구역으로 잡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결계의 역할을 한다. 도리이를 넘어서는 순간 신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리이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기둥에 두 개의 들보를 얹어 연결해 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도리이의 기원에 관한 여러 설이 있다. 나무를 묶어 출입구를 표시했던 것에 발생했다는 설에서 인도 고대 불탑의 입구나 중국의 전통문인 패루(牌樓) 한국의 홍살문을 본딴 것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없다. 일부에서는 도리이라는 이름이 새가 머문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점에 착안해서 한국과 중국 등에서 보이는 솟대와 같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새를 상징한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서울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 신사,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 건립하기도

신사가 일본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시아 근동에서도 신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벌이던 시기 식민지 곳곳에 신사를 건립했다. 특히 신사가 많았던 나라는 대만과 조선이었다. 대만에 세워진 대만신궁(臺灣神宮)은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던 시기(1895~1945)에 있었던 신사이다. 현재의 대만 타이베이시 중산구 원산대반점 자리에 있었다. 옛 이름은 대만신사(臺灣神社)다. 대만신사는 국가에서 폐백을 올리는 신사라는 뜻의 관폐대사 역할을 하다 ‘대만신궁’으로 개칭됐다.

대만신궁 건물은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에게 밀려 대륙에서 타이완섬으로 피신한 것을 일컫는 ‘국부천대(國府遷臺)’ 이후로 국민당 정부에서 철거했다. 대만신궁 외에 다양하게 건립된 신사들도 대부분 철거됐고 신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중일전쟁 전사자 추모 시설인 충렬사를 건립했다. 대만 각 지에 있는 충렬사는 거의 대부분 과거 신사 자리다. 현존하는 유일한 신사는 타오위안 신사인데 일본의 단교 선언 이후 남은 잔재마저 없애려던 것을 1980년대 이후 정비해 보존해 둔 것이다.

일본의 신사가 가장 많이 세워진 곳은 조선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곳곳에 신사가 만들어졌다. 조선 총독부는 강점 초기부터 조선에 일본 문화를 이식하고 조선사람들에게 일본의 국민 의식을 심기 위해서는 관폐대사를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정신문화의 원형을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겠다는 발상에 나온 것이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1925)이 가장 대표적인 국가 신토 계열의 신사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국가 의례가 거행됐다. 조선신궁은 대한 제국 병합을 단행했던 메이지(明治) 일왕(천황)과 일왕가(천황가)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최고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안치해서 신사의 격을 높이고, 일제의 조선 지배가 문명화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려 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신궁에는 총독부 관료와 황족 등 일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참배가 아닌 구경을 위해 조선 신궁을 찾는다고 할 정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결과 조선인의 참배는 학교 학생들의 강제적인 단체 참배가 대부분이었고 개인적 방문은 드물었다. 일제는 국가 신토를 조선에 침투시키기 위해 국가 의례로서의 성격과 문명화를 강조했다.

조선신궁을 제외하고도 1945년까지 일제가 조선에 세운 신사는 모두 82개였고, 재조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각지에 세운 크고 작은 신사까지 합치면 모두 1062개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 신궁을 정점으로 신사들을 통해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조선인들에게 신토와 신사는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것으로 여겨졌다. 그결과 해방 이후 각지의 신사들은 대부분 바로 파괴됐다. 남산에 조선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인들에게 삶의 위안처 역할을 하는 신사가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내선일체를 획책하는 문화침략의 교두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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